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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그 누구도 시대의 가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시절이었습니다. 세탁소집을 하던 저희 집은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남들만큼은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세탁소에 도둑이 들어 세탁물을 몽땅 잃어버렸습니다. 신용을 중시하던 부모님은 손님들의 옷값을 전부 배상해주셨고 이내 우리 가족은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언니가 갑자기 눈병을 얻어 치료를 해야 했고 막내 남동생까지 태어났습니다. 버거워진 살림으로 인해 부모님은 둘째 딸이었던 저를 외가집으로 보내기로 결정하셨고 당시 겨우 세 살이었던 저는 부모님의 곁을 떠나야 했습니다.

부모님과 떨어져 살면서 기가 죽거나 주눅이 들었던 기억이 한번도 없었던 것을 보면 저는 꽤 배짱이 두둑한 아이였던 모양입니다. 오히려 구김살 없는 밝고 큰 웃음으로 외가 식구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곤 했습니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건데, ‘인생의 가장 큰 영광은 한번도 쓰러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쓰러질 때마다 일어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그 시절에 체득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정치에 처음 입문하자 ‘세탁소집 둘째 딸이 부정부패한 정치판을 세탁하러 왔다‘고들 했습니다. 영국병을 고치고 영국을 다시 일으켜 세운 영국 최초의 여성총리 대처가 구멍가게집 둘째 딸이라는 점이 저와 흡사한 까닭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비유를 대처처럼 국가에 공헌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저는 대구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대구에서 보냈습니다.
제가 학창시절을 보낸 대구는 1960년대, 경제개발지상주의 아래 섬유발달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런 이유로 물질만능의 병폐가 더 압축되어 나타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학창시절을 돌이켜 보면 선생님에 대한 좋은 추억도 있는 반면, 기성회비를 내지 못한다며 꾸지람 하고 수업을 못 받게 하는 등 지금도 납득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선생님으로 인해 어린 마음에 상처로 남은 아픈 기억도 있습니다. 

한 번은 촌지를 유난히 밝히는 선생님을 ‘와이로쟁이’라며 흉을 본 제 친구가 사정없이 따귀를 맞은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저라도 선생님이 잘못했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어서
책가방에 책을 넣고 그 즉시 교실을 나왔습니다. 반에서 1등이며 모범생이던 저의 행동에 모두들 놀랐습니다. 부조리한 세상의 일면에 그저반발하고 대항하기만 했지, 변화시킬 수는 없었던 나이 어린 학생이었지만 저는 다짐했습니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부정부패에 맞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을 소명으로 삼겠다고.

경북여고시절 1학년 신입생 교실, 국어 선생님께서 좌우명을 물으셨을 때 저는 당당히 대답했습니다.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겠다.” 매순간 최선을 다해, 훗날 뒤돌아 보아도 한 점 부끄럽지 않은 깨끗한 삶을 살겠다고...

법대로의 진학은, 그런 다짐이 이어진 결과였습니다. 그런데 한양대학교에서는 집안형편이 어려워 대학진학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저에게 성적 우수 학생으로 법대 장학생으로 뽑아 
전 학년 수업료도 면제해 주고, 기숙사 생활과 생활비까지 주었습니다. 그 때 저는 ‘나의 공부는 나의 사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에 보탬이 되어야 하며 사회를 위해 쓰여야 한다는
결심을 했고, 한양대학교 법학과에 진학을 했습니다.

 

대학교에 입학 후, 고시공부를 위해 해인사에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며칠 내내 내린 눈으로 인적이 없던 어느 날, 편지 한 통이 배달됐습니다. 같은 대학 동기동창이었던 서성환이라는 학생이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저 동양화 묵선 사이 여백의 운치가 좋다는 내용이었지요. 그런데도 저는 편지를 읽고 나서, 책에 집중 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깊은 눈매가 떠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얼마 뒤 서울로 와 그를 만났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그의 눈빛은 사랑하는 사람의 그것이었습니다.

제 생애 처음 시작한 사랑은 뜨거웠습니다. 한양대학교에서 집까지 10킬로미터를 걸어가면서  공중전화가 나타날 때마다 그에게 전화를 거는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덕분에 당장 눈앞에 두고 있던 사법시험에서 보기 좋게 낙방을 했습니다.

이후 1982년 24회 사법시험에 제가 먼저 합격을 했고, 건국 이후 16번째 여성합격자인 저를 그는 아낌없이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3년 뒤 사법시험에 합격한 그와 7년의 열애 끝에 결혼을 했습니다.

남편과 결혼을 앞두고 집안의 반대도 있었습니다. 영남집안에서 호남 사위를 보는 일은 당시만 해도 흔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도 결국 서성환이라는 사람의 진솔함에 허락을 하셨습니다.

남편 서성환 변호사는 경복고등학교 3학년 때 교통사고를 당했고, 이후 스무 번이 넘는 대수술을 받으며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그 후유증으로 그는 아직도 한쪽 다리가 불편합니다.

남편은 지금 자신의 삶은 덤으로 사는 것이라고 늘 말합니다. 그 때 죽었을지도 모르는 목숨이었는데 진심으로 돌봐주고 기도해 준 사람들 덕분에 살았다며, 자신도 그들처럼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살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껏 고향인 정읍에서 변호사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라디오에서 들으니 ‘번지점프대’에 올라간 사람들 중, 아래로 뛰어내릴 확률이 높은 사람들은 건장한 청년이나 젊은이들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밑에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쳐다보며 아이들이 응원을 하고 있는 어머니나 아버지라고 합니다.

어머니, 아버지... 부모란 것이 그런 것 같습니다. 특히 일하는 엄마, 그것도 정치를 하는 엄마는 번지점프대에 서듯 위태로운 마음으로 일상의 조화를 저울질 해야하곤 합니다. 

세 아이의 엄마로서,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판사로서 저 역시 번지점프대에 오르는 심정으로 아슬아슬하게 생활한 적이 많습니다.

아이들을 키우며 예상치 못한 난관도 생기고, 도저히 넘길 수 없을 것만 같은 고비들도 맞닥뜨리게 됩니다. 하지만, 매순간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 그 고비를 넘겨 왔습니다.

그럴 때의 심정은, 마치 번지점프대에서 뛰어내렸을 때의 쾌감과도 같습니다.
어려운 사건을 처리했을 때, 하루를 무사히 마치고 잠든 천사같은 아이들을 볼 때, 저는 느낍니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충만함을 .

 

1986년, 10월 28일 대학생 1500여 명이 참가한 
건국대학교 점거 농성 사건 이후, 정부는 사회를 공안정국으로 몰아갔고, 서적에 대한 전국적인 압수수색이 진행됐습니다.
제가 춘천지방법원 판사로 있던 시절, 제게도 책과 관련된 영장신청이 들어온 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전환 시대의 논리>처럼 일반인도 다 아는 책들이었습니다. 국민이 바보입니까? 
아니면 국민을 바보로 만들고 싶은 것이었을 겁니다.
더 어이없었던 것은 영장신청 서류를 받아보니 다른 건 아무것도 없고, 그냥 책 백 권의 목록만 주욱 적혀 있었습니다. 현대판 분서갱유였습니다.

그런 영장에 제 이름 석 자를 남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1987년 어느날, 강원대학교 학생 3명이 시위를 주도한 죄목으로 영장이 청구됐습니다. 하지만 죄질이 무겁다고 생각되지 않는 제 판단 아래, 두 학생의 영장을 기각했지요. 그날 새벽 2시, 관할경찰서장이라는 사람이 다짜고짜 제게 전화를 해 기각한 영장을 다시 발부하라고 
거칠게 요구했습니다. 

저는 ‘법적 양심’에 따라 판결을 냈습니다. 그러다보니, 억울하고 무거운 죄명이 씌워져 잡혀 온 소위 시국사범이란 학생들을 곧이곧대로 처벌하기보다는 약식 기소나 훈방으로 풀어주는 사례가 늘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올곧은 법적양심을 따라 걸어온 판사로서의 삶-그 속에서 저는 정치가 발전이 안 되면, 법이 왜곡된다는 것을 여러 번 느꼈습니다.

 

 

“ 호남 사람인 제가 대구 며느리를 얻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정치에 법의 양심을 심어보겠습니다.”

당시 야당 총재 김대중 대통령과 나눴던 대화들로 기억합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지난 10년 동안의 법관 생활,가슴 속에 품어 온 법의 정의를 사회의 어느 곳에 심어야할지 고민하고 있던 무렵, 김대중 대통령에게서 만나자는 전화가 왔습니다.

1995년 8월의 마지막 일요일 ,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 ... 김대중 대통령과의 만남을 앞두고 망설이는 내게 남편은 말했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대외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하는 판사로서, 야당 정치 지도자를 만난다는 것 자체가 구설수에 오를 것이 뻔합니다. 만나고 나서 정치를 하든 안하든, 사표 낼 각오는 하는 게 좋겠지요...나는 당신이 하겠다면 주말 부부가 아니라 월말 부부라도 감수할테니 걱정 말고 소신껏 판단해요”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 부부를 만났습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통합이란 화두로 창당을 준비하던 중, ‘껄끄러운 판사’라는 소문을 통해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전화를 했었다고 합니다.

저는 김대통령의 격려를 통해 법의 이면에 버티고 선 정치 ,그 자체에 도전할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당하게 야당 출신 여성 부대변인 1호가 되었습니다. 세탁소집 둘째 딸 추미애가 10여년 간의 법복을 벗고 정치판을 세탁할 한국의 대처로 불리며, 15대 국회에 진출했습니다. 

 

“혼자 꿈을 꾸면 꿈에 불과하지만 여럿이 꿈을 꾸면 현실이 된다”

정치라는 전혀 낯선 행선지 앞에선 저는 무엇을 보고 달릴까요? 바로 꿈을 보고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꿈이 있는 사회는 땀 흘린 사람이 그 땀의 대가로 조그만 집 하나 허리 휘지 않고 장만할 수 있는 사회를 말합니다.

꿈이 있는 사회는 출생지 때문에  부모의 출신성분 때문에 소외되는 사람이 없는 살맛나는 사회를 말합니다.

누구나 동등하게 경쟁할 수 있는 꿈이 있는 사회. 노력한만큼 보람을 얻는 사회, 따뜻한 정이 흐르는 사회, 그런 이상적인 사회가 현실이 되는 사회를 말합니다.

그런 사회를 설계해 온 국민이 꿈보따리를 품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저 추미애가 하고자 하는 일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꿈을 실현하며 살 수 있는 세상이 올 것이라는 기대- 저 추미애 변함없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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